이동식(前 KBS기자)두만강 넘어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이 누르하치라는 영명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떨쳐 일어나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후금(後金), 곧 금(金, 1115∼1234)을 잇는 나라를 선언한 것이 1616년.
후금은 광해군(光海君)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조선왕국과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1623년 반정(反正), 즉 군사 구데타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인조(仁祖)가 명(明) 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후금에 불리한 정책을 추진하자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1627년 1월 3만의 후금군(軍)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龍川) ·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淸川江)을 넘었다. 광해군을 몰아내느라 북방에 대한 경계를 풀었던 인조 이하 신하들은 큰일이 났다. 관군은 전투에서 패하고 후금에 대항할 군사가 없다. 인조는 조선 팔도에 의병을 소집하라는 긴급 지시를 내린다.
인조 5년 1월 24일에 내린 이 지시, 곧 교서(敎書)는 당시의 문장가인 장유(張維, 1587 ~ 1638)가 작성한 것인데, 당시 몹시 급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에 대한 잘못을 통절(痛切)하게 써내려간다.
“왕은 말하노라. 아, 치란(治亂,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잘 안되고 하는 것)과 흥쇠(興衰, 흥망성쇠)야말로 나라마다 필연적으로 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초래된 원인을 따져 보면 임금의 잘못에 기인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사변(事變)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적에는 나태하게 무사안일만을 즐기면서 법도를 어그러뜨리고 덕을 잃어, 위에서 분노하고 아래에서 반기(叛旗)를 드는데도 멍청하게 반성할 줄을 모르다가 결국은 화를 당하고는 훌쩍훌쩍 울지마는 그때는 어찌할 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옛날 역사를 살펴보면서 이 점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해 왔었는데 오늘날 그만 이런 전철을 밟게 될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인조는 자신이 네 가지의 잘못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기에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 곧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고 말한다.
“즉위 초에 백성의 고통에 뜻을 두고 면제해 주도록 여러 차례나 명령을 반포했건만 이를 걸맞게 봉행(奉行) 하지 못한 나머지 실질적인 혜택이 끝내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도탄(塗炭)에 빠져 슬피 부르짖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백성을 속였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민심을 잃게 된 첫 번째 이유이다.
역적과 관련된 사건이 누차 일어나 큰 옥사(獄事)가 서로 잇따르게 되었는데, 원흉과 괴수야 물론 그 죄로 복주(伏誅, 사형에 처함) 당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여러 가지로 연루(連累) 된 자들 가운데 어찌 억울하게 걸려든 자가 없겠는가. 필부 한 사람이라도 원한을 품게 되면 하늘의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한데, 더구나 필부 한 사람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닌 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민심을 잃게 된 두 번째 이유이다.
세 번째 이유는 공연히 명나라 장수를 지원한다고 군량을 보내니 물자를 보내니 해서 백성들을 피폐하게 한 것이고,
네 번째 이유는 백성 가운데 유랑민이 많아져 세금을 낼 사람들, 군대 보낼 인원이 부족해지자 이를 해결한다고 호패법(號牌法, 일종의 주민등록법)을 너무 급격하게 강력 시행하다가 사람들의 자유를 속박하고 너무 괴롭힌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다가 일단 제도를 시행하고 나니 중도에 그만둘 수 없어서 계속하다 보니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리고 떨어져 나간(이반.離反) 것이다.
내가 덕이 부족한 사람으로서 불운한 시대를 만나 국가가 장차 패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가 없기에 삼가 하늘의 밝은 명을 두려워하며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 뒤로는 밤이나 낮이나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 줄 방도를 생각해 왔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나는 지혜가 사리를 밝히기에 부족하고, 인덕(仁德)이 생령들에게 은택을 내려 주기에 부족하고, 믿음이 사람을 감화시키기에 부족하고, 무덕(武德)이 난을 제어하기에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정사를 펴고 일을 계획함에 있어 걸핏하면 도리에 어긋나기 일쑤였고,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은 고달파지고 군사는 피로에 지치게 되었다.
그 결과 갑자년(1624, 인조 2)에 변란(變亂, 이괄의 난을 뜻함)이 일어나면서 역적이 거꾸로 물어뜯어 묘모(廟貌, 종묘)가 엎어지고 신기(神器, 왕위)가 위태롭게 되고 말았는데, 그 변란을 초래한 원인을 깊이 생각해 보면 허물이 실로 나에게 있는 것이었다.”
이 글을 모면 왕의 통렬한 반성문인데, 이것은 사실 신하들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정치를 하면서 일어난 일을 다 왕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맞는가 하는 문제가 있겠지만, 모든 크고 작은 결정을 왕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에 결국에는 왕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라는 것은 권력을 올바르게 쓰는 것이고, 권력의 방향과 속도를 정해주는 것이라면 한 시대 정치의 성공과 실패는 결과적으로 그 당시를 다스린 왕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대에 와서도 정치의 성공과 실패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대통령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인조의 네 가지 반성을 보면 결국 정치라는 것은 국민들을 편안하게, 배부르게 하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으로 가는 길이 어렵다. 올바른 정치의 길은 무엇이고 어떻게 그 길을 가야 하는가? 이전에 제왕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고 신하들은 또 어떤 것을 요구했나?
현대에 와서 민심(民心)이란 말을 많이 한다. 국민들의 마음이라는 뜻일 텐데, 국민들의 마음이라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가? 혹 국민의 마음이란 미명 아래 권력의 독점을 노리는 것은 아닌가?
경복궁 근정전 내부 모습.
우리나라가 정치의 근간으로 삼은 유학(儒學)에서는 정치의 본질을 의(義)와 이(利), 두 글자로 푼다. 의(義)와 이(利) 두 글자로 해서 잘못(邪)과 올바름(正)이 나누어지고 국가 정치의 성패가 결정 난다. 국민들의 기본적인 마음, 곧 민심은 이(利)를 추구하는 마음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라가 유지되고 튼튼해지려면 의(義)가 살아야 한다. 그것은 또 천하가 올바로 가는 도(道)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고르게 균형을 유지한다면 정치는 성공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정치를 실패한다. 대개 현대의 정치사에서 대통령이 임기 말에 물러나거나 당적을 이탈하는 등 수난이 뒤따르는 것도 이것으로 풀 수 있는데, 친인척 비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의(義)를 제대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며, 백성들이 살림살이에 불만이 많아진 것은 이(利)가 적절한 선에서 구현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라라는 것은, 정조(正祖) 대왕이 한탄한 것처럼, 참으로 복잡하고 정치는 참으로 어렵다
“아, 우리나라 400년의 규모를 유지하고 이끌어 온 것은 실로 사대부의 의리에 힘입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속으로 본다면 유생은 벼슬길을 이익으로 여겨 작문 솜씨로 요행을 맞는 기술로 삼고, 평민은 한가롭게 노는 것으로 이익을 삼아 밭 갈고 길쌈하는 것을 등한한 일로 여긴다. 탐관은 재물을 이익으로 삼아 백성을 학대하는 정치가 많고, 청렴한 관리는 명예를 이익으로 삼아 도리에 어긋나는 명성이 앙등한다.
심지어 조정은 모든 것의 표준이 되어 인솔하는 입장인데 의리와 이익이 더욱 혼잡하며, 선발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개탄이 많고 언론은 사사로움을 따르는 폐단이 많다. 강론을 하거나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는 의리를 논하는 것이 양양하게 많지만 식견 있는 이가 곁에서 본다면 천 가지 길과 만 가지 도로가 모두 이익으로 치닫고 한 갈래 의리의 바른길은 거의 잡초에 묻혀 버릴 지경이다.”
-<홍재전서> 권48 책문 1
인심이 발동하는 것은 칼날과 같고 사나운 말과 같아서(人心之發如銛鋒如悍馬,《心經附註卷1》) 쉽게 제어할 수 없다. 국가적인 위급을 당한 인조가 자신의 이름으로 공개한 네 가지 잘못이 그 뒤에 말끔히 시정된 것을 보지 못했다. 동양 5천 년의 역사는 늘 그런 식이었다. 아무리 지도자가 착한 마음, 선량한 마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갖고 있는 막대한 권력을 제어할 견제장치가 없으면 언제든 독단으로 가던지 독재로 가게 된다.
예전에 동양사에서는 신하들의 도리와 임금의 도리로 나누어 임금의 생각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장치로 경연(經筵)이라던가 목숨을 건 간언(諫言), 그리고 역사에 영원히 기록된다는 무서운 말로 정치를 바르게 해보려 했지만 성공보다는 실패로 점철됐음을 우리는 보아왔다. 그렇지만 그런 역사 속에서도 정치의 바른길을 함께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