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前 KBS기자)5천 년 중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제왕으로 평가되는 당 태종의 뒤에는 잘못을 진언하는 명재상 위징이 있었기에 찬연한 문화를 꽃피운 황금기가 열렸다. 위징은 태종에게 준엄했으며 정면으로 비판했으나 태종은 귀를 열고 200차례가 넘도록 위징의 간언을 수용하여 잘못을 바로잡았다. 정치의 교과서《정관정요》는 태종과 위징의 대화록이라 일컬어질 정도다.
그러나 위징은 먼저 세상을 뜨고 ‘태종의 거울’은 깨어진다. 괴롭히는 신하가 없어진 태종은 노재상이 목숨 걸고 반대하는 고구려 전쟁을 일으키고 연개소문에게 대패하여 실정을 시작, 권력은 측천무후에게 넘어가고 당나라는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5천 년 중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평가받는 당 태종, 그는 사방을 정복해 중국의 영역을 확장했으며, 그의 치세는 그 이후 중국의 역사·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학문을 애호했던 태종은 직접 역사책도 편찬했고, 서예에도 뛰어나 비석에 새겨진 그의 글씨는 천년 이상이나 각급 학교에서 본받을 만한 서체 중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중국의 8세기에 해당하는 당나라 중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찬연한 문화를 꽃피운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이는 태종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제도를 개혁하여 사회 경제적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태종의 정치를 가능하게 한 요인은 무엇일까? 태종 자신이 천성이 총명하고 사려가 깊으며, 무술과 병법에 뛰어난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도 갖추고 있어서 신하들의 지적을 과감히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것임은 앞서서 지적한 바와 같다. 그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바로 위징(魏徵 580∼643)을 대표로 하는 많은 인재들이 황제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위징은 누구인가?
역사가들은 위징을 춘추전국시대의 관중(管仲, ?~BC.645)과 후한 말기 삼국 병립 시기의 제갈공명(諸葛孔明 181년 ~ 234년)의 맥을 잇는 명재상으로 평가한다. 제갈공명은 한이 멸망한 뒤 위, 촉, 오로 병립한 삼국시대 촉한(또는 촉나라)의 승상(재상). 촉한 유비가 지금의 쓰촨성에 세운 나라로 나중에 유비는 촉한의 황제에 오르며 제갈공명을 승상으로 삼았다. 유비는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공명을 얻고, 오나라의 손권과 유비를 연합하게 하는 전략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퇴했다.
재상이면서도 강직한 면에서 위징은 앞의 두 재상을 능가한다. 그의 명성은 황제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아 높아졌다. 목숨을 건 그의 직언에 대해 태종은 때로는 기분이 나쁘고 때로는 죽이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의 말을 들음으로 당태종은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다.
정관(貞觀) 8년(634)에 당 태종은 궁궐을 몇 채 더 짓고 싶어 재상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공사를 멋대로 시작했다. 재상인 방현령(房玄齡, 578~648)과 고사렴(高士廉, 575~647)이 길에서 영조(營造), 곧 대궐의 공사 책임을 맡아보는 소부감(少府監)인 두덕소를 만나 물어보았다. “북문, 곧 내정(內廷)에서는 요즈음 새로 무슨 공사를 하고 있는가?”
두덕소가 이 사실을 태종에게 아뢰었다. 이에 태종이 방현령 등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다만 재상의 관아의 일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내가 내정에 약간의 공사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들의 직책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에 방현령 등은 황공해서 사과해 마지않았다. 이에 위징이 진언하였다.
“저는 폐하께서 방현령 등을 꾸짖으시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방현령과 고사렴이 사과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방현령은 일찍부터 대신으로 일하고 있어, 말할 것도 없이 폐하의 손과 발, 눈과 귀에 상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궁전 안에서 공사가 있다면 어찌 모르고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방현령이 담당 책임자에게 물었다고 해서 꾸짖으시는 것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거기다가 공사에 대해서는 역시 방법에 좋고 나쁨이 있고, 공사하는 사람을 쓰는 데에도 많고 적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 하시는 일이 정당하다면 당연히 폐하를 도와드려서 완성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만약 하시는 일이 정당하지 않다고 하면, 이미 공사가 착수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폐하께 말씀드려서 중지시켜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군주가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정당한 도리입니다.
방현령 등이 공사를 담당한 관원에게 물은 일은 본디부터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폐하께서는 그것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방현령 등은 자신들의 지킬 바 정당한 직분을 분별하지 못하고, 다만 꾸지람을 받아들여 사죄하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 또한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위징의 간언을 듣고 태종은 깊이 자신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겼다.
정관 15년 태종이 측근에게 물었다. “나라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쉬운 일일까?”
위징이 대답했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태종이 반문했다.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의 의견을 잘 들으면 되지 않겠는가. 반드시 어려운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말이오.”
그러자 위징이 대답했다.
“지금까지의 제왕을 살펴보십시오.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는 훌륭한 인재를 등용해서 그 의견에 귀를 잘 기울이지만, 나라의 기반이 튼튼해지면 반드시 마음이 해이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신하들도 자기 몸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고 군주에게 잘못이 있어도 굳이 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국정은 날로 어지러워져서 끝내 망하게 됩니다. 예로부터 성인이 ‘편안할 때 위태로운 때를 생각하라(居安思危)’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나라가 편안할 때야말로 마음을 다잡고 정치에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은 어려운 일이라고 아뢰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자꾸 들으면 짜증이 나는 법이다. 성군인 당 태종도 매일 자신을 혼내는 위징에게 드디어 울화가 치밀대로 치밀었다. 하루는 황제가 조회를 마치고 들어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황후에게 말하기를 “그 촌놈을 죽여 버려야지…” 하면서 단칼로 목을 칠 것 같은 위세를 보이기에, “왜 그러십니까?” 하고 황후가 물었다.
당 태종의 치세(627∼649)는 흔히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하여 중국사에서 최고의 정치 황금시대로 길이 추앙되는데, 그것은 위징이 항상 직언으로 태종의 잘못을 스스로 고치도록 했고 태종도 그 말을 잘 들었기에 가능했다. 태종은 무슨 일을 할 때에 늘 위징으로부터 꾸지람을 당할까 조심했다.
위징이 일찍이 휴가를 청하여 묘제(墓祭, 무덤 앞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내고 돌아와 당 태종에게 아뢰기를,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폐하께서 남산으로 행차하기 위하여 행장을 끝마치고 난 뒤에 결국은 행차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리하였습니까?”라고 하니, 태종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이 꾸짖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중간에 철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당 태종은 “위징이란 놈이 조회 때마다 나를 욕보인단 말이요.”라고 말한다. 황후가 듣고 물러갔다가 조복(朝服,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붉은빛 비단으로 지은 옷)을 갈아입고 황실에 들어와 황제께 넙죽 절을 한다. 황제가 의아해서 물으니 황후의 말이 이러했다.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君明臣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위징이 곧은 것을 보니 폐하의 밝음이 드러나는지라 경하 올리옵니다.” 황제가 황후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는 자신의 화를 풀고 기뻐하며 직언하는 위징의 모습을 되새겼다고 한다.
위징의 간언은 준엄했으며, 때로는 태종을 정면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태종은 이에 대해 화를 내는 일도 간혹 있었으나 200여 차례에 걸친 그의 간언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그러나 위징은 태종보다 18살이나 많아서 태종보다 먼저 죽었다. 태종은 위징이 죽자 자기가 비춰보던 거울이 깨졌다고 애통해했으나 곧 직언을 하는 신하가 없어지자 편해졌다.
그래서 마지막 꿈이었던 고구려 침략에 나선다. 이제는 그를 말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병상에 누워 위독한 재상 방현령은 이 전쟁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을 미리 알고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을 그만두라고 간했으나 듣지 않는다.
결국 태종은 몸소 고구려 침략에 나섰으나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대패해 거의 몇 백기만 이끌고 물이 질퍽거리는 요하를 건너 간신히 중국 땅으로 도망쳐온다. 태종의 유명한 탄식이 여기서 나온다.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이 전쟁을 막았을 텐데….”
결국 태종의 뛰어난 통치는 대 고구려 전쟁의 실패로 빛을 잃게 된다. 그리고 후계구도의 불안으로 결국 측천무후에게 권력이 넘어가게 된다. 그 뒤 현종 대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는 등 당나라는 흔들리게 된다. 참으로 뛰어난 재상의 역할이 이만큼 중요하며, 황제가 이런 재상 등 어진 신하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당나라의 수도가 있던 서안(西安). 우리가 정치의 요체라고 즐겨 읽는《정관정요》는 당 태종이 측근 신하들과 정관 시대에 펼친 정치, 정치의 득실에 관해 문답한 말을 모은 것으로 치도의 요체를 담았으며 당 나라 오금이 저자이며 10권으로 되어있다. 이 책은 실은 태종과 위징의 대화록이며, 동시에 신하는 어떻게 황제에게 직언을 해야 하고 황제는 또 신하의 말이 옳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정치교과서이다. 신하들의 옳은 말을 받아들이면 황제는 성공하고 그들을 물리치고 아집을 부리면 황제는 망한다. 위징은 태종에게 <십점소(十漸疏)>라는 열 가지 조항의 호소문을 병풍에 써서 왕에게 올리고 바른 정치를 해달라고 주문하였고 동양의 신하들은 이 <십점소>를 그들의 상소를 쓸 때의 모범 답안이었다.
태종과 위징의 관계는 꼭 옛날 군주와 신하의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꼭 대통령과 관리 사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당의 지도자, 단체의 지도자, 회사의 경영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교과서이다. 지도자는 누구나 자신과 다른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 그렇다고 그런 소리를 외면하거나 나아가서는 아예 소리도 못 내게 하는 것은 자신이 실패의 길을 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바른 소리를 해야 할 측근들이 바른 소리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면 그것은 더욱 더 망하는 길이다.
언로가 막히거나 왜곡되면 그것을 뚫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항상 있어왔다. 더구나 지금은 과거와 달리 제도권 언론을 통하지 않고도 여론을 형성하고 그 여론을 전달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활짝 열려 있다.
이미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활용한 1인 미디어가 제도권 언론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도 나라 안팎에서 목격되고 있다. 지난 해 선거 때 SNS가 위력을 발휘하자 이를 애초부터 막아보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규제하는 방안을 찾았지만 곧바로 헌법소원에서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옴으로써 SNS를 통한 선거운동 자체를 규제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현대에서도 이런 만큼 이제는 언로를 막으려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서 언로를 어떻게 열어줄 것인가 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전향해서 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을 틀어막을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부정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는 여론을 일으키고 몰고 가는 기법이 가장 극성을 부리고 있다. 떼로 몰려다니며 여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치를 한쪽으로 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선거 때마다 SNS 전문가들이 영입돼 전략적으로 활용된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SNS라는 것은 무슨 대책이 필요한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정당이면 정당, 정권이면 정권이 마음을 열고 국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시작하면 저절로 풀리는 문제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언로를 열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조금은 옛날 식 생각이 아닌가 싶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언로를 트고 여론을 듣는 원리는 그대로인데 여론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정치로 가는 길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포용하는 지도자는 성공할 것이지만, 그것을 꺼리는 지도자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조직이든, 지도자의 생각이나 방침과 다른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조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비판이 없으면 곧 독선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다행히 몇 년에 한 번씩 국민들로부터 심판을 받는 과정이 있어 그나마 독선이나 잘못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 선거가 유명무실해지거나 부정선거로 민의가 왜곡되면 정치에 대한 반성도 없어지고 나라는 특정 집단만을 위한 권력 독점과 사리사욕의 수단이 된다. 그것을 막으려면 정권 자체에서 나 반대파로부터 비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 목소리가 바로 현대판 위징의 충언이다.
국민들의 지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 진정으로 국민들을 위해 사심 없이 일하는 정치가들을 우리가 바라는 이유이다. 자신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적으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무너지고 타락하는 지름길임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