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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역사 칼럼] 듣기 싫더라도
  • 이창준 기자
  • 등록 2025-12-26 23: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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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前 KBS 기자)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대를 이룬 당 태종 이후 100여 년이 지난 당나라는 난국에 직면했다. 당시 하북(河北)과 하남(河南)의 각 번진(藩鎭, 변방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는 곳)이 동맹하여 당나라 조정과 전쟁을 벌였고, 관중(關中, 중국 서북부의 섬서(陝西, Shanxi)성 중부의 평원지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때의 근거지)에서도 이회광(李懷光) 등이 난을 일으켜 황제는 2차례에 걸쳐 수도인 장안(長安)을 탈출하여 피난 길에 올라야 했다. 이럴 때 당나라를 구한 사람이 육지(陸贄 754~805)이다. 


육지는 780년 당시 황제인 덕종(德宗, 당나라의 제 9대 황제(779~805). 조용조제(租庸調制)를 폐지하고 양세법(兩稅法)을 시행하여 재정 충실을 꾀하였으나 지방 번진들의 반란으로 그들의 자립을 인정해줌으로써 중세적 군벌시대의 도래를 열어주었다)의 신임을 얻어, 난국에서 항상 황제의 곁에 있으면서 조칙(詔勅, 황제의 명령 또는 그 명령을 적은 문서)의 기초와 정책 입안을 담당하는 등 실질적으로 재상의 역할을 했다. 세금을 과다하게 거두어들이자는 신하들을 황제의 측근에서 물리치고 조용조법(租庸調法, 당나라 때의 세제로 땅에서 나는 농작물에 대한 세금을 조(租)라 하고, 사람을 대상으로 부역을 시키는 것을 용(庸)이라 하고 가구마다 세금을 매기는 것을 조(調)라 했음)의 정신에 따라 세금의 폐해를 시정하고 당 태종의 예를 따라서 널리 간언할 수 있는 길을 여는 등 정국을 수습했다. 


그러나 황제에게 직언을 너무 자주하여 점차 덕종의 불만을 사기도 해 결국에는 지방으로 좌천되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는 위징 이후 가장 간언을 잘 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억된다. 육지가 황제에게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도록 권한 말이 있다. 

 

“간하는 자가 많은 것은 우리 군주가 간언을 좋아한다는 것을 표시하고, 간하는 자가 곧은 것은 우리 군주가 포용을 잘한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간하는 자가 광망(狂妄, 미친 소리, 망언)한 소리를 하고 속이는 말을 하는 것은 우리 군주의 관대함을 증명하는 것이고, 간하는 자가 하기 어려운 말을 입 밖에 꺼내는 것은 우리 군주가 잘 들어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諫者多 表我之能好 諫者直 示我之能容 諫者之狂誣 明我之能恕 諫者之漏泄 彰我之能從 《資治通鑑 卷229 德宗4》)

 

또 이런 말도 했다.

 

“군주가 이기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아첨하는 말을 달게 여길 것이요. 군주가 허물을 부끄러워하면 반드시 직간(直諫)을 싫어할 것이요. 군주가 위세를 부리면 인정을 내려주어 국민들과 가까워지는 것이 안될 것이요. 군주가 방자하고 괴팍하면 반성하여 법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上好勝必甘於佞辭 上恥過必忌於直諫 上厲威必不能降情而接物 上恣愎必不能引咎而受規 《資治通鑑 卷229 德宗4》)


육지는 임금과 신하 사이,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는 9가지의 병폐가 있어서 소통이 잘 안된다고 지적한다. 그 9가지는 다음과 같다. 

 

“이른바 아홉 가지 폐단이라는 것은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好勝人)과 

잘못을 가르쳐 줌에 듣기를 부끄러워하는 것(恥聞過)과 

변설에 능란한 것(騁辯給)과 

총명을 자랑하는 것(衒聰明)과 

위엄을 돋우는 것(厲威嚴)과 

강퍅을 함부로 부리는 것(恣剛愎)으로 

이 여섯 가지는 주군과 윗사람의 폐단입니다. 

아첨하는 것(諂諛)과 

눈치 보는 것(顧望) 그리고 

두려워하는 것(畏愞)

이 세 가지는 신하의 폐단입니다. (所謂九弊者,上有其六而下有其三:好勝人,恥聞過,騁辯給,眩聰明,厲威嚴,恣強愎,此六者,君上之弊也;諂諛,顧望,畏忄耎,此三者,臣下之弊也 《資治通鑑 卷229 德宗4》)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왕정은 왕의 독재 체제라기보다는 왕과 신하들의 협의에 의한 합의 정치 체제로 보는 것이 순리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유학자들이 관직을 맡으면서 유학자들은 제왕을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 성인이 되면 정치를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해서 왕에게 경연(經筵, 왕이나 동궁의 앞에서 학문을 강의하던 일, 시강)을 열어 성인의 가르침을 조목조목 가르치고 따졌다. 경연은 왕에게 유학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진강(進講) 하고 논의하는 교육 제도이다. 중국 전한(前漢) 때에 황제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관례가 생겼던 것이 원류로서 우리나라에는 고려 문종 때에 처음으로 도입되어, 조선에서는 제도가 정비되고 기능이 강화되어 일명 ‘경연 정치’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왕의 교육시스템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은 세종과 성종이었다. 그러나 반면 세조나 연산군은 경연을 귀찮아했다.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유교적인 명분론은 항상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조실록>에는 경연 관련 기사가 매우 빈약하며 연산군의 경우에는 초기에 경연을 자주 거르거나 오랫동안 쉬다가 신하들로부터 다시 참석하라고 자주 주청을 받기도 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학문이 성취되었다며 경연을 폐지하겠다는 전교를 내리기도 했는데 그 이후 연산군이 독단에 흘러 정치가 엉망이 되고 결국에는 왕위에서 쫓겨나야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조선조 명종 19년(1564년) 2월13일, 오랜만에 경연이 열렸다. 중종의 둘째 아들로서 즉위 8개월 만에 숨진 인종의 뒤를 이어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은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바람에 그 등쌀에 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다가 재위 20년 가까이 지난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왕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시작한다. 경연이 열린 것도 문정왕후가 연로해서 힘을 쓰지 못하던 때였다. 모처럼 경연이 열리자 신진 사림(士林, 벼슬에 진출한 젊은 선비그룹)을 대표하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이 왕에게 아뢴다.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고 군주의 덕이 성취됨은 경연에서 이루어지니, 경연의 중요성은 재상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군주의 덕이 갖추어진 뒤에야 어진 재상을 알아 임용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경연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만은 후세에는 다만 형식만 있을 뿐이고 실제가 없었습니다. 이제 임금의 덕이 숙성하시어 학문에 대하여 밝게 깨달아 의심이 없으시니, 더욱 유념하시어 부지런히 경연에 나아가신다면 성덕이 더더욱 빛날 것입니다.

근래에 성상의 체후(體候, 신체상태)가 편치 못하시고 국가에 또 변고가 있었던 데다가 날씨 또한 추워서 오랫동안 경연을 열지 못했으므로 신 등은 늘 걱정되었습니다. 요즈음 삼가 임금이 내리는 글이나 뜻을 보건대 강학(講學, 신하들이 유교의 경전 등을 강의하며 학문을 가르쳐 드리는 것)에 연연하는 뜻이 있으니, 이것을 듣고 보는 자들이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학문의 도는 신하를 접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공경을 지극히 하는 것만이 아니니, 한가로울 때에 더욱 몸을 닦고 살펴야 합니다. 옛날 부열(傅說)(중국 은(殷)나라 고종(高宗) 때의 재상(宰相), 토목 공사 일꾼이었는데, 당시의 재상으로 등용되어 중흥(中興)의 대업을 이루었다.)이 고종(高宗)에게 경계하기를 ‘생각의 처음과 끝을 학문에 둔다면 저도 모르게 덕이 닦일 것이라고 하였으니(念終始 典于學 厥德修 罔覺 《書經》<說命>), 학문의 길은 모름지기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주가 학문을 좋아하여 신하들을 접견하여 자주 강론하는 것이 옳지만 근래에 행하지 못하였구나. 나의 뜻을 승정원에 모두 내려보냈다. 대체로 아뢴 뜻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기대승은 또 아뢰기를,

“언로(言路)는 국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가 편안해지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가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나 지금 언로가 크게 열려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난번 하늘의 변고로 인하여 직언을 구하였을 때 5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상소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제 또 상께서 그 말의 근원을 끝까지 힐문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 대해서 기대승이 경연에서 왕에게 아뢴 말을 엮어 지은 《논사록》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에 앞서 헌부에서 상소하였는데, “궁금(宮禁, 궁궐에서 국정에 개입하는 일)을 엄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거늘 제목(除目, 벼슬을 제수하는 글)이 내리기도 전에 득실을 먼저 알고 윤음(綸音)이 내리기도 전에 시중에서 먼저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 옥사를 결단하는 중에 사봉(斜封, 사사로이 임명하는 문서)이 내리기도 하고 혹 직책을 제수할 때에 내지(內旨, 왕비 쪽에서 내려오는 지시)가 내리기까지 하여 도하(都下)에서 떠들썩하게 전파되고 있으니, 어찌 성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운운한 내용이 있었다. 이에 상이 노하여 지평 이기(李墍)에게 해석하기를 명하여 힐문하였기 때문에 선생께서 아뢴 것이다.-) 신은 이 뒤로부터 더욱 진언(進言)하는 자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옛날 당나라 육지가 덕종에게 말하기를 ‘간하는 자가 광망한 소리를 하고 속이는 말을 하는 것은 곧 우리 군주의 관대함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니, 행여 사리에 맞지 않고 경솔한 말이 있더라도 심상하게 여기고 용납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자기의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게 하여야 합니다.” 

(≪논사록≫(論思錄) 상권 갑자년 2월13일 명종조) 

 퇴계 이황(왼쪽)과 고봉 기대승

대체로 명종은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선정을 펴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2년 후인 1567년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 뒤를 이은 선조도 나중에는 동서 붕당에다가 임진왜란을 당하는 등 수난의 왕이었지만 처음 즉위한 때에는 여러 현인들의 말을 들으려 애를 썼다. 즉위 1년 남짓 지난 1569년 정월, 선조는 당시 가장 덕망이 높은 선비인 퇴계 이황을 이조판서에 임명했다. 그러나 퇴계는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세 번이나 사양을 했다. 선조는 일단 그 사양을 받아들였다가 도저히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의정부 우찬성에 다시 임명했으나 퇴계는 거듭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 뜻이 너무 강한지라 선조는 같은 해 3월 1일 퇴계 이황을 만나 물어본다. ≪왕조실록≫은 당시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지금 돌아갈 것인데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하니, 


이황이 대답하기를,

“옛 사람들은 ‘치세(治世, 잘 다스려지는 시대)가 걱정이 되고 명주(明主, 똑똑한 군주)가 오히려 위태롭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명주는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고 치세에는 걱정할 만한 일이 없으므로, 독단적인 슬기로 대중을 제어하면서 여러 신하들을 경시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따라서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대가 비록 치평(治平)의 시대인 듯 하나 남쪽과 북쪽에 전쟁의 단초가 있고 민생은 지쳐 있어 걱정할 만한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상의 자질이 고명하신데 비해 여러 신하들의 재지(才智)가 성상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일을 논의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독단의 슬기로 세상을 이끌어가려는 조짐이 없지 않으므로, 식자들은 그 점에 대해 미리 염려하고 있습니다. 

신(臣)이 전날에《주역》의 건괘(乾卦, 주역 64괘 가운데 첫 번째 괘. 하늘의 성격과 본질적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에 ‘날으는 용이 하늘에 있다(飛龍在天)’는 것과, 또 ‘높이 오른 용이 후회가 있다(亢龍有悔)’는 말에 대해 아뢰었습니다.(용은 곧 임금을 뜻한다. 용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왕이 권력의 최고위에 올라가 한창 권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항룡유회는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이 내려갈 길밖에 없음을 후회한다는 뜻으로, 부귀영달이 극도에 달한 사람은 쇠퇴할 염려가 있으므로 행동을 삼가야 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임금이 지나치게 스스로 뛰어난 체하여 신하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덕을 함께 하지 않으면 어진 이들이 아래에서 도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높이 오른 용이 후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학문의 공정이 무너지지 않아야 사의(私意)를 이겨 낼 수 있어 그러한 병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대답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의 초반 정치는 청명하게 하여야 정직한 인물이 등용되므로 임금이 과실이 있으면 간쟁(諫諍, 간관들이 국왕의 과오나 비행을 비판하는 것) 하였는데, 임금이 이에 대하여 싫증을 내게 마련입니다. 이때 간사한 무리가 그 기회를 노려 온갖 아양을 부리게 되는데, 그러면 임금은 마음속으로 만약 이런 사람을 임용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겠다고 여겨 그때부터 소인배와 합하게 되어, 정직한 사람은 손댈 곳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사태가 이에 이르면 소인배가 득세하여 못하는 짓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신정(新政)의 초기라서 모든 간쟁에 대해 뜻을 굽혀 따르고 있으므로 큰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 성상의 마음이 혹시라도 달라진다면 꼭 오늘 같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리된다면 그때는 간인들이 필시 승세를 타게 되어 초정(初政)과는 크게 상반될 것입니다. 당 현종(唐 玄宗)의 개원(開元)시기(당 태종이 정치를 잘 한 것을 ‘정관의 치’라고 하는데 비해, 현종도 연호를 개원(開元)이라고 쓰는 기간(713년~741년) 동안 정치를 잘 했기에 후세 사람들이 이를 ‘개원의 치’라고 한다)에는 어진 신하가 조정에 가득하여 태평을 이루었으나 현종이 욕심이 많은 것을 기화로 이임보(李林甫, ? ~ 752, 중국 당 현종(玄宗) 때의 재상으로 아첨을 일삼고 유능한 관리들을 배척하여 ‘구밀복검(口蜜腹劍) 즉 입으로는 꿀처럼 달콤한 말,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이라는 말을 낳았으며, 당(唐)을 쇠퇴의 길로 이끈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와 양국충(楊國忠, ?~756, 당나라 중기의 재상. 양귀비의 친척으로 등용되어 현종에게 중용되었다. 뇌물로 인사를 문란시키고 백성으로부터 재물을 수탈하는 등 실정을 계속하여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사천성으로 도주하다가 살해되었다)이 오직 봉영(逢迎, 윗사람의 뜻에 맞추는 일)을 일삼았으므로, 군자는 모두 떠났고 소인배만 남게 되어 끝내 천보(天寶)의 난(당 현종 재위시에 일어난 안사의 난(安史之亂), 곧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록산과 그 부하인 사사명과 그 자녀들에 의해 일어난 대규모 반란을 말한다)을 일으켰습니다. 똑같은 한 사람의 임금이면서 마치 두 사람의 일인 양 달랐던 것은, 처음에는 군자와 마음이 맞았다가 끝에 가서는 소인과 친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상께서는 이 점을 큰 경계로 삼아 선류(善類, 성품이 어진 사람들)를 보호하여 소인배들로 하여금 모함을 못하도록 하소서. 이것이 바로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이며 신이 경계의 말씀으로 드리고 싶은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선조는 “내 이를 마땅히 경계로 삼으리라.” 하며 퇴계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 애를 썼다. (《선조수정실록》2년(1569) 3월1일,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가 죽고 그 다음 왕인 광해군 시대에 편찬된《선조실록》은 당시 집권한 북인 세력인 기자헌(奇自獻)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것이어서 공정한 입장을 지키지 못했고 임진왜란 당시에 사료가 많이 없어진 데 따라 빠진 점이 많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북인이 물러가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곧 서인 입장에서 빠진 부분을 수정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수정을 결의한 것은 인조 즉위 후 19년이 지난 1641년이고 수정이 끝난 것은 효종 때인 1657년이니까 15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현대 한국에 있어서 정부가 출범할 때에는 국민들의 많은 기대를 받으며 출범하는 관계로 의욕이 넘친다. 특히 대통령은 그동안 마음속에만 있던 과감한 개혁조치를 곧바로 시행하려 한다. 그런데 국정을 해 나가면서 초기에는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참아내었지만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듣기 어려워한다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퇴계가 “성상의 자질이 고명하시어 여러 신하들의 재지(才智)가 성상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일을 논의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독단의 슬기로 세상을 이끌어가려는 조짐이 없지 않다”고 걱정한 그대로였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처럼 앞에서 이끌어가는 스타일의 지도자일수록 그런 우려가 높았고 역대 대통령을 거치면서 그것이 어느 정도 현실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대통령이든 누구든 지도자는 자기 귀를 언제나 열어 놓아야 한다. 방송이나 신문이 정책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을 ‘발목을 잡는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자신의 귀에 달콤한 말만 가려서 듣고 국민의 뜻을 알 수 없게 되어 국민들의 마음이 떠난다는 것은 수 없는 역사가 증명한 바이다. 사람들은 "정치는 경영과는 다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으면 정치는 독선이 된다. 그 독선은 위험하다"고 말해왔다. 우리나라는 역대로 정권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정권이 잦은 비난에 힘을 잃고 심지어는 대통령이 출신 당적을 버리는 일이 잦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점에서 연유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바로 그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스스로 미리 알고 잘 대처하라는 뜻일 게다. 예전에 왕은 아침저녁으로 그러한 역사 공부를 경연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했지만 이제는 그런 자리가 없고 대신 감사원, 국정원 등의 감찰보고나 언론을 통해서 듣게 되는데, 비판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이야말로 국민들로부터 눈과 귀를 닫는 일이 될 것이다. 국민의 비판은 언제나 겸허히 듣고 그중에서 옳은 소리, 잘못된 소리를 구별하며, 자신의 부하 가운데서도 소인배를 물리치고 선류(善類, 성품이 어진 사람들) 받아들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일국의 지도자라는 자리는 어렵고도 힘들다. 그것은 구중궁궐처럼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외로운 섬이다. 일반 사람들과의 소통이 그만큼 어렵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각오를 단단히 하지만 끝내 귀가 막히고 눈이 닫히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들은 5년이 결코 길지 않다는 점을 실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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