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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제 칼럼] 병오년(丙午年), 적토마 같이 다시 달리는 해
  • 이창준 기자
  • 등록 2025-12-28 20:45:35
  • 수정 2025-12-28 20:5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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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의 매개자이자 권위의 상징, 말의 상징성으로 읽는 새해

조성제(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우리 역사와 신화 속에서 말은 가축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잇는 상서로운 매개자였다. 말의 출현은 곧 왕의 탄생이었고, 국가 질서의 개벽(開闢)을 알리는 징표였다. 부여 해부루왕(解夫婁王) 설화에서 곤연(鯤淵)에 이르러 눈물을 흘린 말은 금와왕(金蛙王)의 탄생을 예고했고,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설화에서도 우물가에서 무릎 꿇고 절하는 말은 천손(天孫) 강림(降臨)의 증인이었다. 이처럼 말은 언제나 제왕(帝王)의 서사(敍事)를 여는 신성한 징후였다.


아기장수 설화에 등장하는 말 또한 그러하다. 말은 아기장수를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등장하며, 장수가 죽은 뒤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용마가 함께 생을 마감한다. 말 무덤의 전승은 인간과 말이 단순한 주종 관계를 넘어 운명을 함께하는 동반자였음을 말해 준다. 특히 백마는 말의 신성함에 흰색이 지닌 벽사(辟邪)의 힘이 더해져, 신의 뜻을 전하는 가장 강력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러한 말의 신성성은 권력과 죽음의 영역에서도 이어진다. 말은 제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였기에, 고대에는 순장되기도 했고, 사후에도 주인의 위엄을 호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마형대구(馬形帶鉤) 같은 유물은 말이 죽은 뒤에도 권위와 신성을 지닌 수호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강원도 정선, 남해안 지역에 전하는 말 신앙 역시 말이 신격화된 존재였음을 말해 준다.

 

민간신앙 속 말은 벽사와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다. 말의 피가 귀신을 쫓는 힘을 지녔다고 믿은 관념, 도깨비 설화 속에서 말 피로 액을 물리친 과부의 이야기는 말이 가진 주술적 힘을 보여준다. 동시에 말은 재산 증식과 생산력을 상징했다. 고구려 대무신왕조의 명마 ‘거루’가 백제 말 100필을 이끌고 돌아왔다는 기록은, 말이 곧 부와 번성의 표상이었음을 웅변한다.

 

말은 또한 충절과 의리의 상징이다. 의마총 전승과 임진왜란 때 전사한 장군의 시신을 물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 이야기는, 말이 죽음 앞에서도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래서 말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간의 삶을 호위하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시간과 우주 질서 속에서도 말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지지로는 오(午), 시간으로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방향은 정남(正南), 계절은 여름, 달로는 6월에 해당한다. 가장 뜨겁고 밝은 시간대, 양기(陽氣)가 정점에 이르는 자리가 바로 말의 자리다.

 

이러한 상징성은 말띠 사람들의 성격 해석으로도 이어진다. 말띠는 자유와 전진, 독립성과 모험의 기질을 지닌 존재로 여겨진다. 불같은 성정과 빠른 판단력, 매력과 추진력은 장점이지만 성급함과 충동성은 스스로 경계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띠가 정체를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여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는 점이다.

 

병오년(丙午年)은 바로 이러한 말의 해다. 신과 인간을 잇고, 죽음과 삶을 가로지르며, 정체를 허락하지 않고 끝없이 달려온 말의 상징성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병오년(丙午年) 새해! 말처럼 과감하되 신성함을 잊지 않고 자유롭되 책임을 지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것이 오랜 신화와 민속이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는 말의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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