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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 칼럼] 요순(堯舜)임금 다시 엿보기
  • 이창준 기자
  • 등록 2025-07-06 22: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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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공자왈 맹자왈'을 익히면서 중국 역사를 지나치게 신봉해 왔다. 역사인지 신화인지 애매한 때도 있었지만 요순(堯舜) 시대를 태평성대로만 알고 있다.


요(堯)는 요임금 堯字이고, 순(舜)은 순임금 舜字이다. 대체로 요임금은 제위 기간이 70년 이었는데 평화를 구가하였지만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홍수로 황하강이 범람하는 등 고통이 여간 심하지 않았다.


요순시대의 홍수는 자연재해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다.

구약시대의 노아의 홍수는 밤낮 40일간 비가 내렸는데 이는 인간에 대한 하늘의 심판으로 본 것이다.


오로지 농업만이 삶의 터전인데 농사를 망치게 되었으니 백성의 원성이나 고통이 컷을 것이다.


요임금은 단주(丹朱)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부자유친이 아니라 현대 용어로 엇박자 부자지간이었다.


부자는 피로서 대(代)를 이어져 오지만 상극 관계도 더러 있다. 카인이 아벨을 계획 살인한 것도 그러한 연유로 보인다.


요임금은 왕위를 세습을 시키지 않고 바둑판을 주면서 아들을 변방으로 보내어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때가 바둑의 시원이기도 하다.


단주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대단하였을 것이다. 이는 권력의 속성이 예나 지금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인류사에서 가장 원한이 크게 쌓인 사람은 요임금의 아들 단주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랬을 것이다.


단주는 역사를 보는 안목은 요순 임금보다 뛰어 났다고 한다.

단주의 '대동통치정신'이 좌절되어 결국 중국과 조선이 대립하게 되는 역사로 변해 버린 것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예나 지금이나 기본인데 자식에게 엄청난 상처를 안겨 주면서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면 이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ㆍ


결국 왕위는 순(舜) 임금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는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맹인으로 성격이 포악했다. 


요임금은 딸이 둘이나 있었는데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순임금의 아내로 삼게 한 것이다. 전략적인 결혼이 많이 있긴 했다.


이는 조선조 모사꾼인 한명회가 여식 둘을 왕비로 책봉케 하였으나 모두 조로사하고 말았던 것이 연상 되어 진다.


한명회도 악업(惡業)을 쌓았기에 세조가 죽은 후에 몰락을 했는데 단종을 따르는 무수한 사람을 죽인 죄업으로 보인다.


결국 순임금도 그 능력으로는 홍수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치산치수를 하기 위한 기술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치수를 제대로 못한 리더가 만고의 성군이라는데 이의가 내재되어 있다.


결국 다음 임금인 우(禹)가 홍수를 제대로 막게 되었으며,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 나라가 탄생된 것이다. 물을 길 따라 흐르게 하여 치수를 가능케 한 것이다. 자연과의 조화는 만고의 진리다.


지금 중랑천 개발을 제대로 하지 않고 강폭을 인위적으로 좁힌 욕심으로 인하여 폭우가 내리면 범람을 하고 있다.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는 대체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이긴 하지만, 긍정적인 역사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비판의 메스를 가해 본다면 적잖은 부정적인 요소가 요순시대 에도 내재되어 있다고 보인다. 


공과의 功은 포장이 되고 과(過)는 묻히어 지고 말았는데 인류의 역사는 대체로 그러하였다.


이경국(칼럼니스트. 사단법인 박약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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