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혼인한지 예순 돌(60년·1갑자)이 되는 날을 회혼(回婚)이라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혼례식을 다시 올리고 자식들과 친지들로부터 축하 받는 잔치가 회혼례(回婚禮)다.
태어 난 지 60년째 되는 날인 회(환)갑도 쉬운 일이 아닌데 결혼 60동안 해로하는 부부가 있다면 그 얼마나 축하받을 일인가. 그야말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자식 키우며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함께 겪으며 60년의 세월을 살아 왔다.
회혼례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조선시대 숙종 기묘사화 당시 박명겸의 범죄 진술서에 “무인년(1698년)에 외조부모의 ‘회혼례’를 치르고서 상경하였는데, 집의 어미가 병이 지극히 위중하였다는 말을 듣고 즉시 창황하게 내려갔다”는 것이 첫 기록(숙종실록 35권)이다.
또한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회혼례를 사흘 앞두고 부인 풍산 홍씨(혜완)에게 쓴 편지가 남아 있다. 다산은 15세에 한 살 위인 홍 씨와 결혼했지만 전라도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 후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자식들이 마련한 회혼례를 사흘 앞두고 60년 동안 고락을 함께한 부인을 향한 연정과 인생의 허무함을 시로 남겼다.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흘러갔는데 / 복사꽃 화사한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 살아 이별하고 죽어 헤어짐이 늙음을 재촉하지만 /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하지만 다산은 애석하게도 회혼례 당일 별세했다.
회혼잔치는 자녀들이 회혼을 맞이한 부모를 위해 마련한다. 회혼례 날 노부부는 젊은 시절 혼례를 올릴 때처럼 혼례복을 입고 혼례의식을 재현했다. 자손들로부터 술잔을 받고 친척과 친지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이날 자손들은 고운 옷으로 차려입고 춤추고 어리광을 부리며 부모의 장수를 빌었다. 하객들은 노부부의 해로를 축하하고 자식들의 효심을 칭찬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생일을 중시한 반면 결혼기념일을 중시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부터 혼인 60주년이 되는 회혼만은 매우 중시했다. 회혼례는 자녀들 입장에서는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현이고, 노부부는 자녀를 키우고 해로한 것에 대한 기쁨과 보람을 자랑하는 잔치다.
그 바탕에는 유교의 근간인 효사상과 가문의식이 깔려있다.
잔치의 규모는 자손들의 사회적 지위나 재력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상류층 가정 일수록 많은 사람을 초청하고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하는 등 큰 잔치를 열었다.
회혼례를 통해 가문을 드러내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결혼 60주년이 됐더라도 누구나 잔치를 열지는 않았다. 특히 먼저 세상을 떠난 자녀가 없어야 하는 등 부부의 직계 가족 구성원 모두 건강하고 화목해야 가능했다.
대부분의 가문에서는 회혼례를 경험해보지 못하고 ‘어느 집안의 누가 회혼례 잔치를 열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데 그쳤다. 이는 회혼례가 얼마나 어려운 의례인지를 알려주는 증거다.
그래서 회혼례를 올린 부부가 탄생하면 이웃 마을의 처녀 총각들은 시집 장가 갈 때 반드시 이 노부부를 만나도록 권했다. 회혼을 넘긴 노부부에게 덕담을 들은 신혼부부가 백년해로를 한다는 풍속 때문이다.
예전에는 10대에 혼인하는 조혼(早婚) 풍습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길지 않아 회혼례를 맞는 사람이 드물었다.
평균 연령이 80세가 넘어 선 최근에도 회혼례를 맞이하는 부부가 드물기 때문에 시·군 등 지방자치 단체나 마을단위의 잔치를 베풀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재수가 없어야 100세 산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평균 연령이 늘어난다고 해서 회혼례를 맞이하는 부부의 수가 늘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결혼 연령이 평균 30세가 훌쩍 넘어 선 데다, 30세에 혼인을 한다면 90세에 회혼을 맞게 되니 회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매년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는데다 황혼 이혼 비중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 때문이다.
회혼례는 결혼의 의미를 되새기며 가정의 소중함을 깨우치게 하는 한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다.
60년 세월동안 단맛 쓴맛 겪으며 해로한 노부부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얻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