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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역사 칼럼] (9) 간관의 폐해
  • 이창준 기자
  • 등록 2025-11-15 23:30:46
  • 수정 2025-11-15 23:3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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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前 KBS기자)역사서를 펴면 곳곳에 군주가 신하들의 옳은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간관(諫官)이다.


고대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 등 이른바 삼대(三代)에는 백관들이 각자 자신들의 직책으로 왕에게 정책에 관해 간(諫) 하였는데 진(秦), 한(漢) 이후 처음으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두어 논의를 맡도록 하였다. 


당(唐) 나라를 거쳐 송(宋) 나라 때 그 기세가 대단했다.  송 나라 태종(太宗)이 처음으로 사간(司諫), 정언(正言) 등의 관직을 설치하여 운영하였고, 인종(仁宗) 또한 간관의 인원수를 증가시켜 그들의 세력을 더 키워 주고 그들로 하여금 국론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진종(眞宗)은 뜬 소문을 가지고도 탄핵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간관의 기세가 날로 횡포스럽게 되어 대신들의 권력을 무시하게 되었고 점차 대신들과 간관들이 사사건건 서로 조정에서 다투며 승부를 겨룬다. 간관들이 속해있는 부서인 대간(臺諫: 어사대와 사간원의 총칭)은 권세 있는 간신을 제어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지만 권세 있는 간신들이 어질고 바른 이를 해칠 때에도 역시 대간의 손을 빌렸다.  


나라가 바르게 돌아갈 때는 간관이 국가의 귀와 눈이 되지만 난세에는 권세 있는 간신의 발톱과 이빨이 되어 나라에 화를 입힌다. 저들이 떠들어 대면 듣는 백성들이 혼란에 빠지고 이쪽에서 하려고 하면 저쪽에서 저지하여 윗 사람과 아랫사람이 모두 피곤해지며 곧바로 나왔다가 곧바로 물러나기도 하여 직무를 소홀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 쪽의 말만 귀 기울이고 신임하면  여러 사람의 계책이 아뢰어지지 못하고 조정에서 분쟁이 일어나 나라의 정치가 마비 상태에 이른다. 송 나라 때 이러한 틈을 타고 여진족이 침범해 오는데 조정이 몹시 혼란스럽고 신하들끼리 서로 의심하다 보니 송 나라의 처지로서는 거세게 쳐들어오는 여진족들의 기세를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충직하고 현명한 인재가 여느 때보다도 많았지만 이들이 늘 용렬한 자와 환관들의 입에 곤액을 당하여 탄핵서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나라가 흔들리고 결국에는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한 송 나라의 역사를 우리들은 이제 안다.


이러한 일은 바로 간관들이 국가의 명령권을 쥐게 되자 현명한 자들이 편안하지 못했고 간신(奸臣)들이 오히려 기세를 믿고 제멋대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여진족 금(金) 나라가 송 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의 의논이 정해질 때를 기다릴 경우 우리는 벌써 장강(長江)을 건너가 천하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놀림을 당해도 변명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조선시대 간관들의 폐해를 지적한 글을 남긴 윤휴의 초상화.


나는 생각건대, 이 간관의 제도는 실로 포악스러운 진(秦) 나라 때 상앙(商鞅), 이사(李斯)의 무리가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에 위배되는 정치를 시행하는 데 있어 사람들의 비난을 듣기 싫어하여 이 기관을 설치하여 남몰래 천하 사람의 입을 막으려고 했던 것으로서, 《시경(詩經)》《서경(書經)》을 불태우고 비방하는 사람을 멸족시킨 행위와 똑같은 방법이라 여긴다. 그런데 후대 사람이 그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말하기를 “쟁신(爭臣) 및 간관은 국가를 소

조선조 효종 숙종 대의 문신인 윤휴(尹鑴, 1617~1680)는 남인의 편에 서서 정치를 주도하다가 서인들의 배척을 받고 왕인 숙종에게도 미움을 사서 귀양을 가다가 일생을 마친 사람인데,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서 간관들의 폐해를 조목조목 지적한 글을 남겼다.   


"간관을 설치하고 나서 언로(言路)가 좁아졌다. 대체로 임금의 이목인 간관을 한쪽 편의 사람에게만 제수하고 조정의 관직은 자신의 직무를 각자 전담하는 것으로서 실로 다른 사람의 직무에 간여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후대에 상관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직책을 벗어나 일을 말한 죄를 짓고 하급 관리도 지위를 벗어나 윗사람에게 버릇없는 짓을 하는 혐의를 갖게 되어, 간악한 소인들이 간혹 임금의 신임을 받게 되고 충직한 말과 지론의 계책을 지닌 사람들이 모두가 가슴에 울분을 품게 되는 것이다.

유한 임금들의 기강이 되고 이목과 같은 것으로서 버릴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사와 조고(趙高)의 술책이 (문제로서) 단지 그 당시 사람들만 우매한 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후대 사람을 우매한 자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 ....《백호전서》제27권 / 잡저(雜著) 만필 (漫筆) 중(中)


윤휴는 간관이 한쪽으로 몰리고 편향되면 국정이 엉망이 된다는 말을 하면서 간관 폐해론을 편 것인데 조목조목 그 이유를 늘어놓는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간관을 설치하지 않으면 임금이 어떻게 자신의 과오를 들을 수 있으며 대신들의 죄악을 어느 누가 규탄할 것이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사방의 눈을 밝게 하고 사방의 귀를 통하게 하며, 백관들에게 자문하여 각자 맡은 직책으로 간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물어 각자 자신의 의견을 말하게 하며, 관리들은 조정에서 논의하도록 하고, 상인들은 시장에서 비평하도록 하며, 사자(士子)들은 충직한 말을 올리도록 하고, 악사(樂師)는 시(詩)를 외우게 하며, 보필하는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타이르고 친척들은 임금의 행동을 살피게 하며, 비방목(誹謗木)을 세워 온 천하 사람이 자신의 과오를 공척하게 하고, 진선정(進善旌)을 세워 온 천하 사람이 할 말을 다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것이 바로 옛 선왕(先王)의 제도인 것이다.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간관을 진(秦) 나라 때 처음 설치했다고 하였는데, 진 나라가 간관을 설치하였지만 진 나라가 망한 것은 간관 때문이 아닌 것이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진 나라 때 비방하는 자들을 멸족시켰고 요언(妖言)하는 자들을 죽였으므로 진 나라의 간관들이 아예 말을 하지 못했고, 말을 한 자들은 간언을 한 것이 아니라 아첨하는 말을 하였다. 이리하여 한(漢) 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진 시황(秦始皇)이 자신의 덕(德)을 비유함에 있어 요(堯) 순(舜)보다 더 훌륭하다고 하였고, 자신의 공을 논평함에 있어 오제(五帝)보다 더 높다고 하였지만 천하가 이미 궤멸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알지 못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진 시황은 자신의 잘못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망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당시의 사정을 말한 것이다. 진 시황이 우매한 자신을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는데, 당시 간관들이 어떤 사람은 아첨하는 말로 이익을 취하고 어떤 사람은 간언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익을 취하여 병폐를 더하지 않았는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간관을 설치한 것이 진 나라 때 시작되어 송 나라 때에는 간관의 세력이 대단하였는데, 이사와 조고가 득세한 때를 당하여 간관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이사와 조고 편의 사람들이었고, 채경과 진회가 득세한 때에 간관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채경과 진회 편의 사람들이었다. 이리하여 조고가 이세(二世)에게 사슴을 말이라 하고 송 고종(宋高宗)이 진회를 두려워하여 비수를 지니고 자신을 방어할 때 간관들이 곁에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전후좌우에 있는 자들이 모두가 조고와 진회 편의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할 것이겠는가. 이사는 두 사람이 모여 이야기만 하여도 죽였고 진회는 야사(野史)의 기록을 금지하였으나 간관들은 그중에 끼지 않았는데, 어떤 자는 간관을 설치하고 어떤 자는 제수하기도 하여 간관의 명칭을 팔아 자신들의 술책을 부렸다. 이에 나는 간관이란 단지 간신(奸臣)들이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날개와 같을 뿐이고 임금의 총명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백호전서》제27권 / 잡저(雜著) 만필 (漫筆) 중(中)


윤휴가 볼 때에 조선 왕국의 역사도 그처럼 편향된 간관들에 의해 올바른 생각이 막혀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아! 우리나라에 간관이 없었다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그처럼 혹심하지 않았을 것이고 을사년(1545, 명종 즉위 년)에 간흉들의 기세가 그토록 치성하지 않았을 것이며, 서궁(西宮)에 모후(母后)를 유폐한 인륜의 변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오랑캐에게 포위당한 화난이 어찌 그토록 심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혼자서 이러한 앙화가 간관들로부터 시작된 것에 대해서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백호전서》제27권 / 잡저(雜著) 만필(漫筆) 중(中) 


요는 간관이란 제도가 자기 편 사람들로 모두 채워 국정을 그쪽으로만 몰고 반대편 사람들을 봉쇄하여 다른 말이 나오지 않는 전횡을 하는데 악용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는 언로를 개방하고 인재를 고루 써야 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제대로 간관이 역할을 하도록 중심을 잡아주어야 한다는 것이지, 간관이란 형식 자체를 아주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윤휴의 말은 당시 남인과 노론 등이 극심한 언쟁과 정권 투쟁을 벌인 데 대한 폐해를 남인의 입장에서 지적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례 중에 송 나라 진종이 뜬소문 만으로도 탄핵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대목에서는 그러한 책략의 폐해가 어느 한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론을 이용해 정권을 잡으려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 그러기에 국민의 눈과 귀를 열고 보아서 항상 균형 있게 해주고 그것을 잘 들어 실행하는 것이 정치의 생명이며 지도자의 본분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정치에 관한 원론적인 교과서인《회남자(淮南子)》에 이런 글이 있다.


"그러므로 밝은 군주는 여러 신하들에게서 듣어보고 그 계책이 쓸만한 것이라면 자리의 높낮이를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그 말이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면 말의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지 말아야 한다. 어두운 군주는 그렇지 못하다. 가까이서 어울리고 친한 사람이 잘못되고 바르지 않더라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 멀리 있거나 지위가 낮은 데 있는 사람의 말이라면 힘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는 말이라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꼬투리를 잡아 추궁하고 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인다. 이렇게 하면서도 사방에 만방에 덕을 쐬려고 하는데, 그것은 귀를 막고서 청탁을 분별해 내고 눈을 가리고 푸른색 누런색을 구분하려는 것과 같다. 그것을 어찌 총명하다고 하겠는가? "...《회남자(淮南子)》권(卷)9 주술훈(主術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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