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굿의 기원
굿의 사전적 의미는 무당이 원시 종교적 관념에 의하여 주재하는 새신(賽神)의식의 총칭이라 한다. 즉 무당이 신을 청하고 환대하고 환송하는 과정으로 구성된 무속의례를 굿이라 한다.
굿은 얼마나 좋은 말인지 영어에서 좋다는 뜻인 굿(Good)이 있다. 날마다 좋은 날은 ‘굿데이365’가 된다. 영어로 신의 갓(God)도 굿에서 나왔다.
각 지방마다 굿의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굿이 추구하는 뜻과 목적은 같다. 굿은 우리 민족의 정치, 경제, 역사, 종교, 철학, 사상, 문화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우리 민족 정체성의 결정체다.
굿은 인간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정서를 가슴에 심어주고, 굿이라는 형태를 빌려서 좁게는 개인, 나아가서는 마을 더 나아가서는 나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민초들과 함께 지내왔다.
굿은 현실에서 억압된 인간들의 마음과 이웃 간의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는(화해동심·和解同心) 한편 동질성을 회복하여 하나 된 마음으로 나와 마을의 발전을 기원하는(해원상생·解寃相生) 사회적 순기능 역할을 담당하는 축제라고 할 수 있다.
굿은 초저녁부터 시작을 해서 새벽 2시경 무감을 서고 잠시 쉬었다가 아침 식사 후에 다시 시작한다. 무감은 무녀가 아닌 가족이나 구경꾼이 쾌자를 입고 신명풀이 형태로 춤을 추는 것인데 일상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고 복을 기원하는 것으로, 부녀자들의 억눌린 가슴을 해소하는 순기능이 있다.
이 무감 때문에 생긴 속어가 “굿하고 싶어도 며느리 춤추는 꼴 보기 싫어서 못 하겠다.”는 시어머니 푸념도 생겨났다.
민족의 심성이 담겨 있는 굿을 우리 정신을 잃어버린 시대에 남의 시각으로 남의 정신으로 남의 잣대로 재단한 기록과 외래 종교의 영향으로 굿은 미신으로 치부되어 폄하되고 배척당해 왔다.
한웅천왕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소도를 세우고 삼신께 제사를 올린 것이 굿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제를 올릴 때 큰 동작, 즉 춤을 추면서 삼신께 가르침을 원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굿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 언제 시작되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문헌으로 전하는 종교적 제의로는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전하는 부여의 영고와 고구려의 동맹, 고조선의 무천 같은 제천의식이 굿의 한 형태라 생각해 볼 수 있다.
굿은 한웅천왕 · 단군왕검 시대에 하늘과 소통하는 제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제문(사설)을 낭독하고 큰 몸짓으로 원하는 바를 전달하고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을 것이다.
「쇠꼬리 쥔 놈이 임자」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그 당시 쇠꼬리를 쥔 사람이 임금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旄旄牛尾 舞者所持以指麾 <강희자전>
모모우미 무자소지이지휘
이 말은 모는 희고 털이 긴 소의 꼬리다. 춤을 추는 자가 쥐고서 흔든다는 것으로 무당이 제사를 지낼 때 모우(旄牛)라는 털이 긴 소의 꼬리를 쥐고 흔들며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 굿의 원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천제를 드릴 때 모우(旄牛)라는 흰 소를 바쳤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지금도 굿을 할 때 무당은 부채 끝에 긴 천을 매달아서 춤을 춘다. 이런 형태는 흰 쇠꼬리를 쥐고 춤을 추던 그 당시의 모습이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풍물패는 상쇠가 우두머리다. 우두머리의 상징으로 상쇠 모자에만 상모가 세워져 있다. 그 외 풍물패들은 채상을 모자에 달아 돌리는 것이다.
굿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신께 감사하고 기원하기 위하여 철 따라 신을 섬긴 제사가 춘분맞이 · 하지맞이 · 추분맞이 · 동지맞이라 하였다. 지금도 봄에는 꽃맞이, 여름에는 유두맞이, 가을에는 햇곡맞이 겨울에는 동지맞이 굿을 철물이 굿이라 한다.
또 굿을 할 때 반드시 언덕에서 했는데 모(旄)를 꽂고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丘非人爲之曰丘 丘前高後下旄 <강희자전>
구비인위지왈구 구전고후하모
구는 사람을 위한 언덕이 아닌 것을 구라고 한다. 언덕은 앞이 높고 뒤가 낮은데 모를 꽂는다.
그 당시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모(旄:소꼬리깃발)를 혈구에 꽂았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모를 꽂는 풍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바로 굿을 할 때 떡시루에 서리화를 꽂거나, 마을 굿을 할 때 봉죽화 또는 서리화를 크게 만들어 세우는 것이다. 이 풍습이 불교에 영향을 미쳐 사찰의 당간지주를 세우게 된 것이다.
무당이 춤을 추었다는 기록도 있다.
女能事無形 而舞降神者也 象人兩袂舞形’ <설문해자>
여능사무형 이무강신자야 상인양몌무형
이 기록은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는 것으로 현재 굿하는 무당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전한(前漢)시대 유향이 쓴 『五經通義』에 "東夷之樂 持矛舞助時生也"라 했다. 즉 동이의 음악에 맞춰 창을 들고 춤을 추면 삶에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동이는 음악에 맞춰 창을 들고 춤을 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시대 굿의 모습이다.
단군조선 때 시작되어 <예>로 이어진 무천(舞天)은 바로 하늘을 향해 춤을 춘다는 뜻이다. 부여의 영고(迎鼓)는 북을 치며 맞이한다는 의미이며, 고구려의 동맹(東盟)은 동쪽 하늘을 향해 짐승의 피로써 해혹복본(解惑複本)을 맹세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제천의식을 하나로 연결하면 동쪽에 제물을 차리고 북을 두드려 춤을 추면서 천지신명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일월맞이굿이다.
조선시대 난곡(蘭谷)이 쓴 『무당내력』에 굿을 할 때는 반드시 단군을 먼저 청배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무속 의례인 굿에서 모시는 최고의 신은 단군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지금 굿의 형태는 아마 단군시대 종족인 팔가(八加)들의 제사 형태가 집약 변형된 것이 아닌가 한다.
굿을 할 때는 반드시 공수를 준다. 언제부터 공수가 시작되었고 공수의 의미는 무엇일까? 공수는 한자로 공수(貢壽)와 공수(供授)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에 보면, 신시의 음악을 공수라 한다고 하였다. 공수를 다른 말로는 두열(頭列)이라고도 하였는데, 무리는 둘러서서 줄지어 합창함으로서 삼신으로 하여금 크게 기쁘시게 하고, 나라가 번영하여 민심이 윤택해질 것을 빌었다고 하였다.
『백호통소의』에서는 공수를 조리(朝離)라 했다. 조리란 선(善)과 악(惡)을 구분하고, 시(是)와 비(非)를 가리고, 틀어진 것을 바르게 잡는다는 뜻이다.
또 『통전악지』에서는 주리(侏離)라 하였고, 『삼국사기』는 도솔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수(貢壽)는 인간이나 짐승을 제물로 올릴 때 사용하던 음악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은 굿을 할 때 무당이 목숨을 바친다는 엄중하고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또 다른 공수(供授)는 제사를 지내는 자가 신에게서 무엇인가를 받기를 원할 때 사용하였던 음악이 아닌가 한다. 두열(頭列)은 제사를 지낼 때 하늘에서 일깨워주는 천부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 우두머리들이 줄지어 서 있다는 뜻이다.
즉 팔가(八加)의 우두머리가 열 지어 서서 천부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 깨치는 것을 공수라고 할 수 있다.
공수는 즐겁고 건강하기를 신에게 기원하고 순리에 따라 족함을 안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니 “즐겁고 건강하기를 신에게 기원하는” 부분에서는 지금 행해지는 공수와 큰 차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