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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역사 칼럼] (6)먹줄이 발라야 정치도 이창준 기자 2025-10-09 13:19:55

이동식(前 KBS기자)

먹줄이 발라야 정치도 바르게 된다


옛날 사람들의 정치학 교과서에는 '목종승정(木從繩正)'이란 말이 있다. 원래의 뜻은 “나무(木)는 승(繩)에 따라가면 바르게 된다”는 것인데 승(繩)은 나무를 곧게 자르기 위해 먹으로 곧게 치는 줄, 곧 먹즐이니까 “굽은 나무라 할지라도 먹줄을 친 대로 켜면 바른 재목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곧 “임금이 신하의 곧은 말을 잘 들으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당(唐) 나라 태종(太宗, 599~649)때 나왔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황제에 즉위한 첫 해에  

"바른 군주라도 사악한 신하를 임명한다면 능히 잘 다스릴 수 없을 것이며 바른 신하라도 사악한 군주를 섬기면  또한 능히 잘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물고기와 물과 같아야  나라가 태평해질 것이다. 

내가 비록 밝지가 못하지만 여러분들이 바로잡아 주어야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 바라건대 직언(直言)과 기개 있는 의론에 의해 천하를 태평하게 해나가자!"고 했다. 


이에 간의대부(諫議大夫) 왕규(王珪)가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군주는 간언에 따르면 밝아진다(木從繩則正 君從諫則聖)고 합니다." 라고 회답했다. ...《貞觀政要(정관정요)》<求諫> 第四 

 

태종은 왕규의 말을 옳다고 여기고 조칙(詔勅, 황제의 명령)을 발하여 국가의 정책을 논의할 때 반드시 간관을 배석하여 의견을 개진하도록 제도화했다. 간관을 배석하도록 한 것은 정책의 비평, 비판가를 함께 두어 정책의 타당성을 검토시킨다는 뜻이며, 그것은 곧 언론 활성화이다. 그것이 당나라 최고의 태평성대인 ‘정관(貞觀)의 치(治)’를 연 비결이었다. 목종승정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실제로 간하다가 왕에게 죽음을 당한 간관은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죽음을 면한다고 해도 온갖 수난을 당한다. 조선조 중기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으로 올라서자 당태종의 사례처럼  젊은 청년들에게서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과거 시험에 문제를 이렇게 낸다.

“어리석고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나라의 대업을 이어받긴 했지만 나는 지혜도 모자라고 현명하지도 않다. 깊은 못과 살얼음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갈 방법을 모르듯,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시급하게 인재를 불러 모아 나랏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선비들은 의견이 달라 서로의 차이를 조정할 길이 없고, 서로 마음을 다해 공경과 화합을 이루려는 미덕도 찾아볼 수 없다. 그대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다. 필시 마음속에 북받쳐 오르는 뜻을 품고 있었을 테니, 저마다 자기 생각을 다 표현해 보라. 내가 직접 살펴보겠다." 

  

이에 대해 글을 잘하는 임숙영(任叔英, 1576~ 1623)이 답안을 냈는데 

“오직 어진 신하만이 바르게 간언을 할 수 있고, 현명한 임금만이 간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도리를 지켜야만 군주와 신하가 허심탄회하게 정치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나라에서 언관을 둔 것은 충심으로 간언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몇몇 언관이 간언한 일로 죄를 받았으니, 이는 결국 전하께서 언관을 둔 까닭이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고자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죄를 짓게 하려고 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임금에게 죄를 받았으니, 이 때문에 위로 조정에서부터 아래로 초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말하는 것을 조심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당시 정부의 사람을 쓰는 인사가 왕비, 곧 왕의 처가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는데 이를 비판한 언관들이 벌을 받은 일에 대해서 강력히 항의한 것이다. 이 답안을 본 모든 시험관들이 일등으로 뽑아 올렸다. 


그런데 최종 결재자인 광해군은 수석이 아니라 합격 자체도 인정할 수 없다며 합격을 취소하라고 명령한다. 광해군이 합격을 취소하라고 요구한 말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이렇게 실려 있다.

 

“과거시험에서의 응제문(應製文, 답안지)은 정해진 법식이 있으니, 옛날 사람들은 아무리 과격하고 곧은 말이라도 모두 질문한 제목에 나아가서 도리와 욕심, 공과 사를 논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요사이 인심이 극악하여 오직 임금을 헐뜯고 욕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있으니, 너무나 무리하다. 내가 응시자 임숙영의 응제문을 보니, 그 답이 질문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별도로 제목을 벗어나 방자하고 거리낌 없이 패악한 말을 하였다. 그런데 또 시관이 합격시켰으니 숙영의 임금이 된 자는 너무도 괴롭지 않겠는가. 그가 만약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상소를 하여 극구 말하였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과거장에서 감히 제목을 벗어나 글을 지어 온갖 말로 비방하였다. 만약 이 글을 합격시킨다면 말세의 경박한 무리들이 반드시 앞을 다투어 군상을 욕하는 글을 미리 지어서 시관의 눈을 현혹하여 합격하는 수단으로 삼을 것이니, 그 폐단은 앞으로 바로잡기 어려울 것이다. 임숙영을 방목에서 삭제하도록 하라. 내가 안질로 그 즉시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뜻을 해조에 이르라.” ( 광해군 3년 신해(1611) 3월 17일) 

 

이에 대해서 대신들이 간곡한 만류를 하는 바람에 무려 넉 달이나 지난 후에 겨우 꼴찌로 합격 허가를 받기는 받는다. 이런 경우는 그나마 다행한 케이스라 하겠고 목숨을 잃은 사례는 부지기수였다. 


옛날 왕들은 왜 간관을 두었을까? 


조선시대 정치권력은 일차적으로 왕권과 신하의 권력의 대립으로 이해된다. 신하는 왕권을 견제하려 했고 왕은 신권을 견제했다. 권부 내부의 상호 견제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대간, 곧 사헌부의 대관(臺官)과 사간원의 간관(諫官) 이었다. 대관은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역할을 했으며, 간관은 국왕의 잘잘못을 논박함으로써 국왕의 전제를 앞장서서 저지하는 노릇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관은 간관의 영역인 국왕에 대한 간쟁의 임무를 함께 수행했고, 간관 또한 대관의 영역인 고위 관료에 대한 탄핵을 자기 할 일 속에 포함시킴으로서 그 구별이 흐려졌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했던 조선시대 사헌부의 대관(臺官) 역할을 하는 감사원.

어찌 됐든 이들은 양반 지배층의 여론을 대변하는 언관, 곧 오늘날의 감사원과 언론이었다. 왕은 싫든 좋든 이 대간이란 언론을 통해 관료와 스스로의 직분을 점검했기에 대간은 군주의 눈과 귀라고 불렸다. 조선시대 여론정치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직책은 낮았지만, 권위와 위신이 다른 어느 관리보다 높았고 또 왕 앞에서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학식이 높고 청렴하며 강직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기에 대간들이 왕에게 올바른 소리를 하다가 견제를 당하게 되면 신하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적극 변호했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대간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지게 됐다. 조선조 중기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왕이나 벼슬아치에 대한 반대와 탄핵이 너무 잦아지고 상대 당파를 공격해 정권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도구로 악용됐다. 


이처럼 대간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영조는 대간 임명권을 쥔 이조전랑(吏曹銓郞)의 권한을 유명무실화시키고 대간의 언론권을 무력화했다. 그러나 이 조처는 정조 이후 세도정치를 낳고 급기야는 나라가 쇠망의 길로 치달았음을 우리들은 안다.

 

흔히 조선왕조의 역사는 임금의 권력과 신하의 권력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운 역사라고 보는 견해가 많은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조선왕조의 역사, 조선의 정치사는 왕과 간관들의 대립과 합의의 역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현대의 여론정치가 죽 계속돼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하의 목소리를 바로 듣는 방법, 지나친 목소리에 대처하는 방법과 지혜, 이런 것들이 지도자에게는 필수적이다. 


그런 과제가 현대에도 내려와서도 마찬가지다. 일국의 지도자가 되거나 지도자를 모시는 사람들은 이런 사례를 더 철저히 연구하고 앞으로 발생하는 사례도 그 바탕 위에서 해결책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하겠다. 

 

조선조 정조 때 문신이며 학자인 성대중(成大中, 1732~1812, 호는 청성)은 그의 문집《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 간관의 폐해를 이렇게 걱정한다.

 

“대간(臺諫)은 권세 있는 간신을 제어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권세 있는 간신들이 어질고 바른 이를 해칠 때에도 역시 대간의 손을 빌리지 않았던가. 이는 군대를 이용해서 난리를 평정하지만 난리 역시 군대로 인해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치세에는 대간이 국가의 귀와 눈이 되지만 난세에는 권세 있는 간신의 발톱과 이빨이 되어 나라에 화를 입히니, 이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현대의 정치는 여론을 등에 업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밀고 나간다. 여론은 언론을 통해 형성되며 그것이 선거에 의해 국민의 대표로서의 자격으로 올라서서  정책의 방향을 정한다. 그런데 그것이 상호 견제나 균형이 되면 좋지만 견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되면 일방적인 정책 추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현대 정치의 진정한 비결은 권력의 견제이며, 이를 입법, 사법, 행정이 나누며 거기에 언론이라는 제4부가 또 균형을 잡아준다.  이 4가지의 견제가 어느 쪽이든 무너지면 올바른 정치로 가기가 어렵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더 많은 권력을 독점하려고 권력의 견제장치를 풀어버리려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옳은 지를 먹줄을 보고 수정해야 하는데 자칫 먹줄이 필요 없다고 큰 소리를 치다가는 곧은 재목을 얻지 못할 위험이 많다.

 

옛날 왕권의 먹줄이라고 할 언론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대에 와서도  당파에 따라, 생각과 이념의 차이에 따라 지나친 목소리로 득(得)보다는 실(失)이 많았다. 더구나 현대에 와서는 서로 다른 언론이나 언론을 빙자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면서 올바른 정치의 기준을 잡기 어렵게 되고 있다. 언론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 현대 우리나라 지도자들의 한결같은 희망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신의 통치이념에 맞추어줄 언론의 수장을 갖기 위해 또다시 논쟁을 일으키고 제도를 바꾼다.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의 반대편에서 비판을 하는 입을 막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바른 언론으로 바른 정치를 구현하려면 당 태종이 말한 대로 신하들이 바른 말을 하는 것을 지도자가 용납해야 하고 신하들은 군주가 말 못 하는 것에 대해 바른 말로 이를 시정하도록 말해야 한다. 다만 그 말 하는 법도 정도를 가야 한다. 


역대 우리 정치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정권이 풍전등화가 된 사례를 끊임없이 보아왔다. 그런데 역시 중요한 것은 최고지도자의 자질이다. 옳고 그름을 파악할 수 있는 역량과 시각이 있어야 한다. 정치를 하기 위한 올바른 과정과 결정을 거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정치를 잘 하려던 당태종도  말년에는 판단이 흐려지고 간언을 듣지 않아서 후회를 한 일이 많았다. 진정 국민들을 위한 바른 정치란 그처럼 어려운 일이다.  


바른 언론과 권력의 균형, 이것은 정치를 바르게 이끌어주는 먹줄이다. 먹줄이 계속 탱탱하게, 곧바르게 쳐줄 수 있도록 먹줄의 먹을 충분히 입히고 먹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주어야 할 일이다.  


지도자는 국민들이 자유로운 생각을 발하게 하여 정권의 오류를 줄여야 한다.  역사는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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